“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자율’이란 말의 뜻이다. 그럼 ‘학습 자율’은 무엇일까? ‘배워서 익히는 행위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교사와 학생 스스로의 교류에 따라 진행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학습 자율화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일제고사다. 한 날 한 시에 한 시험지로 일제히 치르는 일제 강점기에서나 어울릴만한 일제고사는 획일주의, 전체주의와 친구일 뿐 자율화에는 상극인 까닭이다.
어째서 그럴까? 최근 나온 신문들 제목만 훑어봐도 웬만큼은 이해가 될 듯하다.
“일제고사가 뭔지 … 초교생 밤까지 자율학습”(<강원일보> 9월 19일치)
“일제고사로 중간고사 대체?”(<한겨레> 9월 18일치)
“‘학력신장’ 앞세운 성과 올리기, 애들 잡는다”(<대전일보> 9월 18일치)
“예정 없던 일제고사로 교육현장은 쑥대밭, 대책은?”(<오마이뉴스> 9월 17일치)
“초등학교 교장 ‘성적 나쁘면 떠나라’...전학 권유”(<MBC>뉴스 9월 14일치)
“방과후 학교, 일제고사용 ‘강제 보충수업’ 변질”(<한국일보> 9월 4일치)
“일제고사가 빼앗아간 방학”(<한겨레21> 7월 24일치)
일제고사 원년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난해였고, 올해는 일제고사 첫돌이 된다. 이명박 정부는 한 손엔 학교 자율화 팻말을, 또 다른 손엔 일제고사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자율화와 일제고사. 이는 양복을 입은 남자가 일본 나막신인 ‘게다’를 질질 끌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꼴불견에 많은 이들이 인상을 찌푸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게다’ 짝을 신은 남자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지난 3월 용역을 수행한 한 대학교수팀의 ‘새정부 교육정책 진단 및 대국민 인식조사’ 연구보고서를 보면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해 국민의 46.7%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성인 남녀 1000명을 전화 설문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0%이었다.(헤럴드경제)
다른 항목에 견줘 낮은 수치지만 그 숱한 말썽을 빚은 일제고사 여론 치곤 낮지 않은 수치다.
이런 배경엔 일제고사를 부추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있으니 그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더블Lee’가 만든 일제고사
이명박과 이주호. 한 명은 대한민국 대통령이고 한 명은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다. 이 ‘더블Lee’가 사실상 일제고사의 몸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24일 기숙형 고교인 충북 괴산고등학교를 찾았다.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그는 이날 일제고사(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우려와 관련해선 “학생들이 차이가 나니 지원해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생각에 막강한 영향을 준 이가 바로 이주호 현 교과부 차관이다. 이 차관은 대선 당시 교육공약을 총괄하는 일(이명박 후보 일류국가비전위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이 차관은 지난 7월 7일 정부가 내는 <대한민국 정책포털>에 쓴 칼럼에서 다음처럼 일제고사에 대한 생각을 펼쳤다.
“전국 수준의 학업성취도 평가를 실시하고 수능 성적을 지역별로 공개하는 것도 학교가 공교육을 책임지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험성적 결과 공개는 교사에게 교수·학습 방법을 피드백해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뿐 아니라 지역별, 학교별로 ‘잘 가르치기’ 경쟁을 유도하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험 결과를 공개해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경쟁이냐는 것이다. 전국 학생들이 한 날 한 시에 같은 시험지에 매달리게 되는 일제고사 문제 풀기 경쟁이 문제라는 것이다.
일제고사 박수 친 조중동과 한국교총
일제고사에 일제히 박수 친 언론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나라 대표 보수신문들인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이다. 그리고 교원단체인 한국교총이다.
<조선> 등의 보수신문과 한국교총의 공통점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2년 표집으로 치른 초3 기초학력진단평가에 대해서도 ‘일제고사’라면서 반대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정권이 바뀌자 전집 일제고사가 분명한 이명박 정부의 시험지 시리즈에 대해 찬성 모드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또 있다. 오는 10월 13일 일제고사를 앞두고 벌어지는 반교육 행위에 대해 일제히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고사에 따른 부작용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한겨레><경향><한국>과는 정반대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리할 때는 입 꾹 닫고 무시전략을 쓰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들의 일제고사 찬성은 정권 코드 맞추기 성격이 짙다. 일제고사를 놓고 펼쳐진 <조선일보>의 상반된 보도를 한번 보시라.
“‘기초학력 부진아를 찾아내는 데 왜 굳이 중앙정부가 나서고, 70만 학생이 하루에 일제히 시험을 쳐야 합니까?’ 기초학력 진단평가 시험에 대해 한 일선 교사는 이메일로 이 같은 불만을 표출했다. …난데없는 일제 시험을 앞두고 초등학생들은 '시험 열풍'에 휘말리고 있다.…아직도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어야겠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교육부는 한 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조선> 2002년 9월 27일치 기자수첩 '중앙집권적 교육')
“전교조는 영악하게도 일제고사에 대한 학부모들의 나쁜 기억을 이용해 '학력 평가'에 '일제고사'라는 엉뚱한 옷을 입히고 학생들의 시험 거부를 유도했다. …학력 평가는 교사와 학교 입장에서 학생들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를 파악해 효율적인 교육방법을 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전교조가 이런 학력 평가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학교, 어떤 교사가 무능력하고 나태한지가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조선> 2008년 12월 22일치 사설)
특히 교사들의 모임인 한국교총의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이중행동은 눈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다. 이들은 올 초 ‘일제고사 불복종 교사를 중징계하라’고 이사회에서 결의했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엔 일제시험에 반대 태도를 나타냈다. 이 단체는 2002년 9월 25일치 성명에서 기초학력진단평가는 '일제 평가'라면서 "부진아 평가는 교사와 학교의 재량사항으로 국가가 획일적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원하는 학교와 시도만 실시해야 한다"고 지금과 정반대 주장을 펼쳤다.
학원자본, 얼마나 맛있는 교육이겠는가
<조선일보>가 차린 교육기업 이름이 ‘맛있는 교육’이다. 이 업체는 외고, 자사고 실전모의평가 상행위로 언론에 오르내린 바 있다. 자기들이 만든 신문 보도에서는 외고와 자사고 설립을 부추기고, 같은 신문사가 차린 업체에서는 돈벌이에 나선 탓이다. 얼마나 맛있는 교육이겠는가?
일제고사도 이와 비슷한 레퍼토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학원자본으로선 일제고사는 제법 괜찮은 장사가 되는 모양이다.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책 검색에서 올해 6월 1일 이후 나온 일제고사 대비 문제집을 검색했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검색창에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라고 치고 살펴봤더니 48권이나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생용이 많았고, 중3, 고1 학생들 문제집도 눈에 보였다. 제목의 보기를 들어보면 ‘학업성취도평가 예상문제 6학년(국가수준)(2009)(2009년 10월 13~14일 시행) 편집부| 동아서적’. 이런 식이다.
내친 김에 학원사이트들도 검색해봤다. 스폰서링크, 파워링크 항목에 ‘학업성취도평가 북마니’, ‘학업성취도평가대비 족보닷컴’, ‘학업성취도평가 대교 공부와락’, ‘학업성취도평가 크레듀엠’ 등의 사이트가 즐비하게 나타났다.
이들로선 일제고사가 학원 활성화를 위한 활로가 되고 있었다. 사교육 잡기에 나선 이명박 정부. 그러나 사교육 줄이기를 막는 훼방꾼이 바로 일제고사를 만든 자신들이란 사실을 알까, 모를까.
일제고사 버팀목은 바로 학벌주의
보수인터넷신문인 <뉴데일리>는 지난 9월 16일치 기사에서 같은 날 진행된 ‘좋은학교 만들기 서울 학부모 모임’(대표 서인숙. 이하 조학모) 창립식 모습을 소개했다. 이 신문이 소개한 이 단체의 창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았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교원평가와 학생 학업성취도 평가시험조차 전교조 교사에 의해 학교서열화 우려 명분으로 반대되고 선동되고 있는 실정이다. 학부모의 교육주권을 공고히 해 황폐화된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겠다.”
이 단체 참여인사들의 면면을 봤을 때 뉴라이트계열 인사들이었다. 반 전교조 친 정권 인사들이 이끌고 있는 단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주장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내세운 ‘공교육 정상화=학업성취도 평가’라는 등식이 일반 학부모 사이에도 퍼져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교육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일제고사를 통해서 바로 세워야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대학을 가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공부를 많이 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줄 세우는 시험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는 얘기다.
이런 생각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학벌주의와 연결된다. 온갖 수단을 노력 동원해 명문대에 가면 좋은 직업을 차지하는 티켓을 얻게 된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 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얘기하고 초등 교육과정의 목표를 얘기하는 것은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학벌주의와 교묘하게 결탁한 정치세력이 있었고, 그 정치세력이 만든 작품이 바로 일제고사인 셈이다.
부진아 대책, 부지런히 내놔야 할 때
이제 왜 일제고사를 부추긴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 생각해볼 시간이다. 저들이 내세우는 일제고사 명분은 크게 ‘잘 가르치기 경쟁’ 조장과 ‘부진아 교육’ 활성화이다.
분명한 것은 대개의 학부모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 현직 교사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부진 학생 지도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부 학부모들이 현 정부의 일제고사 선전에 박수친 건 몇몇 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교조 집행부는 올해 ‘부진아 교육’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학부모에게 내보일 책임 있는 선물은 나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반성은 아무리 늦어도 빠르다고 했던가. 반대운동은 이겨야 본전이다. 이제 반대운동이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해보자’ 운동을 벌여야 할 때다. 이렇게 해야만 저들의 일제고사로부터 학습 자율성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월간<우리아이들> 2009년 10월호.
저도 글케 생각함 뭐 자율권을 준다더니 일제고사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 밤까지 세우게 하면서 공부시키잖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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