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책연구기관이 새 정부의 교육정책에 시비를 걸고 나서는 한편, 전직 장관은 이를 주도한 인사를 교육부 고위직에 임명해 놓고 떠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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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8일 취임 후 첫 국회 교육상임위에서 윤 부총리가 한 교육부 간부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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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교육희망 안옥수 |
한국교육개발원(원장 이종재)이 지난 21일 노무현 대통령의 교육공약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보고서 내용을 뒤집는 '제안서'를 발표해 파문이 일고 있다. 국정과제의 실현 방안 연구를 소임으로 삼은 국책연구기관이 이 같이 정부정책에 정면 반기를 든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교육부 국장이 개혁 시비 건 제안서 작성
또한 이 '제안서' 작성을 주도한 정봉근 전 교수(한국교원대)가 2년 임기인 교육부 교육인적자원정책국장에 지난 17일 취임한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개방형 직위인 교육인적자원정책국장을 맡은 정씨는 이상주 전 교육부장관이 공개모집 형식으로 이미 지난 2월 26일 뽑아놓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 인수위 교육부문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인사들과 교육시민단체들은 "교육부총리와 청와대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사이에 교육시장화 정책을 주도해온 수구집단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라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다음은 한국교육개발원의 '제안서' 내용을 다룬 문화일보 3월 21일치 기사.
"한국교육개발원은 21일 발간한 새정부 교육정책 제안서 '학습하는 사회, 함께하는 교육'에서 …교육계의 민감한 현안인 고교평준화, 수학능력시험 자격화, 교장선출보직제, 교사회 및 학부모회 법제화 등에 대해선 확실한 결론을 유보한 채 신중한 접근만 강조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만든 '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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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 14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낸 제안서의 속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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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윤근혁 | 하지만 이 짧은 기사엔 의도하지 않은 오보가 섞여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제안서를 발간한 시기는 지난 21일이 아니었다. 원본을 입수해 살펴본 결과 이 제안서는 이미 두 달 전인 1월 14일에 만들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한 연구원은 "인수위와 대통령께 보고하기 위해 내부 기밀자료로 만들어 1월말쯤에 보고한 자료"라고 확인했다.
이 기자는 왜 오보를 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 기사 작성자에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더러 교육부 정 국장과 한국교육개발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지난 19일 교육부 기자실에 이 '제안서' 발간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3월 21일 이후 보도를 전제'로 배포했다. 보도자료 제목은 '참여정부 교육정책의 방향과 12대 핵심추진과제 제안.' 내용만 봐서는 21일 발간했다고 보도하는 게 오히려 맞는 해석이었다.
이 보도자료를 만든 19일은 앞서 밝힌 정 국장이 취임한 지 3일째 되는 날. 이상한 것은 정 국장 취임과 함께 두 달 전에 이미 인수위원회에 보고된 내부 기밀문서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마치 새로운 것처럼 공개된 것.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일까. 우연치고는 날짜가 너무 가깝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왕준 홍보담당연구원은 "교사회, 학부모회 법제화, 교장 보직제와 같은 권력구조 개편을 담은 내용이 특별한 연구 없이 펑펑 미리 시행되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제안서를 내게 됐다"고 제안 취지를 설명했다.
'제안서'는 이미 1월에 만든 '기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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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육개발원이 '21일 이후 보도'를 전제로 교육부 기자실에 뿌린 보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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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 최종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만들어 인수위에 전달한 제안서는 내용이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화 정책을 추구한 것이라 참여정부와 코드가 많이 달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인수위에서 무시된 이 제안서를 한국교육개발원은 윤덕홍 부총리 취임 2주일째 되는 날 보도자료를 내면서까지 여론화시키려고 했을까.
그 실마리는 바로 이 제안서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96쪽으로 된 이 제안서의 연구자는 모두 13명. 이 자료엔 연구팀장으로 이종재 한국교육개발원 원장을 적었고, 연구자들 12명 가운데 정봉근 국장을 맨 윗자리에 적어놨다. 정 국장을 뺀 나머지 11명은 모두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이다.
제안서는 12대 핵심추진 과제를 나열한 다음 현안 과제를 따로 떼어내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현안 과제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수학능력시험 자격화 △교장선출보직제 △ 교사회 및 학부모회 법제화 등 4개다.
현정부와 '다른 코드', 한나라당 정책과 일치
이 연구에 참여한 김현진 부연구위원은 "공약 가운데 가치갈등과 쟁점이 되는 것을 추리다보니 현안 과제 4가지를 잡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네 가지 '현안 문제에 대한 검토' 내용은 '가치갈등'의 차원으로 살펴보면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과 상반되는 것은 물론, 한나라당 교육공약과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이 제안서는 고교 평준화 정책과 관련 "여건이 충족되는 사립학교는 자립형 사립학교로 점진적 전환"이라 적고 있다. 노 대통령 공약은 "자립형 사립고 결정 유보"였으며 인수위 보고서는 이에 대한 언급 없이 공교육 강화와 평준화 정착을 강조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대선 공약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자립형 사립고 확대'에 찬성하는 발언을 해온 바 있다.
이 제안서에서 한국교육개발원은 윤덕홍 부총리가 말한 '수학능력시험 자격화'에 대해서도 "자격화보다는 수능의 활용과 수험자의 편의제공 측면의 개선을 우선 추진해야 한다"며 물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수위 최종 보고서는 "자격고사화 수준으로 수능 난이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밝혀 내용이 크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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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의 전체 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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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교육희망 안옥수 |
더욱 큰 문제는 교장선출보직제와 교사·학부모회 관련 내용.
한국교육개발원은 교장승진제도에 대해 "교장 선출보직제는 학교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할 수 있으나 전문성의 확보에는 미흡함이 있다"며 공정한 태도를 보인 듯하지만 곧 이어 "교장의 승진 정책의 선택기준은 전문성 확보에 두어야 함"이라고 적어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또한 공약은 물론 인수위 보고서와 크게 다른 부분. 인수위 보고서는 "교장보직제, 초빙제 등 승진제도 다양화를 추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학교장책임경영제, 자립형사립고, 수석교사제 강조
교사·학부모회 내용을 담은 제안서 부분은 교장책임경영제를 강조한 한나라당 공약과 일치했다. 이 제안서는 법제화 문구는 뺀 채 "교사회와 학부모회는 학교운영 사항에 대한 심의기능을 맡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학교장 중심의 단위학교 책임경영체제가 구축되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한나라당 공약은 교육자치제 부분에서 "학교장 중심의 책임경영제를 확립하겠다"고 못박고 있다.
인수위 최종보고서(1)은 교사회·학생회·학부모회 법제화 추진시기를 '취임 직후'로 분류해 놓았다. 이 밖에도 인수위 보고서는 '취임직후' 해야 할 일로 '교육혁신기구', '교수회 법제화', '교육부 기능 조정'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육개발원 제안서는 이 같은 내용과 상당 부분 엇갈렸다. 더구나 교육부 기능조정에서는 인수위 내용과 달리 '기능 확대'를 제안하고 나설 정도였다.
제안서에서 더욱 기가 막힌 부분은 '12대 교육정책 목표와 과제'의 내용이다. 이 가운데 한국교육개발원 관계자의 말처럼 '가치갈등'이 내포된 항목 가운데 한나라당 정책과 유사한 것만 뽑아보자.
△국가 차원의 초·중등 학업성취도 평가체제의 조기 정착 △교사 자격체제를 이원화하고 수석교사제 도입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위임하는 협약학교 제도 도입 △자립형 사립고의 특색 있는 교육프로그램 허용하고 점진적으로 확대 △선진 외국 우수 대학과 대학원의 유치.
자료 만든 인적자원정책국 정 국장이 답하라
이 한국교육개발원이 제안한 12대 교육정책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인적자원정책국장을 맡은 정 국장이 해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이 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인적자원정책국을 확대 개편하여 실질적인 업무수행능력 제고. 교육부의 총괄 하에 시도 지자체별로 '인적자원개발국'을 신설하여 각 지역의 인적자원정책 기능 강화."
이에 대해 김 국장은 어떤 태도를 갖고 있을까. 24일 세 차례에 걸쳐 비서한테 쪽지를 남기는 등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김 국장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윤덕홍 부총리 취임과 함께 교육부 새 판짜기를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미 인수위 보고서에 그 경로와 방향은 나와 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집단이 있다. 그 집단은 슬프게도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이다. 이 기관은 5·6공화국과 국민의정부 시절 '프로젝트 수주'란 명목으로 교육개혁의 이론을 교육부에 제공해온 곳이다.
이 기관과 손을 잡고 참여정부 교육개혁과 상반된 제안서를 만들어 돌린 한 인사가 이제는 교육부 고위직에 들어와 있다. 그것도 '교육개혁 일정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인적자원정책국의 수장으로.
이 직책은 2년 임기가 보장된 개방형 직위이기 때문에 장관도 손을 대기 어려운 자리다. 문제의 정 국장은 이상주 전 교육부장관과 함께 전두환 정권 시절인 82년부터 3년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에 근무하기도 했다.
수구 관료의 반발 속에 교육개혁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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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댈 수 없는 교육부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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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강도영 | 전직 인수위 한만중 자문위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청와대에 교육을 아는 교육비서관도 없는 형편에서 교육부총리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니 이런 흘러간 시장주의 레코드가 겁도 없이 나오는 것이다."
한편 전교조, 경실련, 참여연대 등 40여개 교육시민단체 모임인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운영위원장 윤지희)는 25일부터 '한국교육개발원과 수구 교육관료들'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강력 대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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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2003년 3월 25일치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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