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6일 수요일

큰 빛 찾아 나선 '범생이' 교장

[이사람2] 한빛맹학교 맹인교장 김양수
 
윤근혁
 

한빛맹학교의 소개책자만 봐서는 교장이 누구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그 흔한 '학교장 인사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장인사말은 보통 학교에서 낸 책자에서 '단골메뉴'가 아닌 '절대메뉴'인데도 이 소개 책에는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소식지를 담당한 바 있는 나로선 조금 희한했다.

▲김양수 교장, 교장실 앞에서.     ©윤근혁
"학교만 잘 되면 되지 교장 인사말이 뭐가 중요합니까. 젊은 사람이 인사치레만 해서야 되나요."

'나를 본 적이 있다'고 한 그는 볼 수가 없다

이 소개책자에서 볼 수 없었던 김양수 교장(38)이 내 앞에 앉아서 말을 시작했다. 9월 18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1동에 있는 학교 교장실에서 그는 입을 열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가 이날 만나자마자 던진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전에 본적이 있죠?"

나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예. 작년 11월에 학교 민주화 운동할 때 제가 취재 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김 교장은 나를 눈으로 본 적이 절대 없다. 김 교장은 눈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전국에 4명밖에 없는 이른바 맹인교장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그다.

김 교장은 사춘기를 갓 지난 18세 때 완전실명 판정을 받았다.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병으로 눈을 잃고 만다.

"일반 고에서도 눈이 안보여 시험지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꼴찌는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교련시간에 줄을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줄을 못 맞춰서 몇 번 야단을 맞다 보니 도저히 학교에 다닐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결국 그는 다른 것도 아닌 '줄을 못 맞춰서' 83년 3월 맹인학교인 이 한빛맹학교로 전학을 올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를 다닌 지 2년만인 85년엔 시각 장애인 최초로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단국대 특수교육과를 나온 다음 서울대 교육대학원에도 들어갔다. 물론 시각장애인으로선 처음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보통사람보다 몇 배의 아픔을 참고 견뎌야 했다. "몇 권 안 되는 점자책을 손이 닳도록 읽었고 강의가 녹음된 녹음기를 귀에 대고 듣다보니 귀가 곯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교사로서 한빛맹학교를 다시 찾은 때는 92년 9월. 그는 이 학교에서 중고등부 영어과와 함께 안마와 침술을 가르쳤다. 그는 96년 4월엔 보건복지부에서 주는 '올해의 자랑스런 장애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줄을 못 맞춰 특수학교로 전학

학교 소개책자엔 다음과 같은 학교 연혁이 적혀 있다.
'1970년 임마누엘 여맹학교 설립인가(초등부). 1976년 한빛맹학교로 교명 변경. 2003년 3월 3일. 제 5대 김양수 교장 취임.'

▲한빛맹학교 교문.     ©윤근혁
서울시에서 유일한 시각장애 사립특수학교인 한빛맹학교.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초등부 34명을 포함 모두 121명이다. 물론 학생은 모두 맹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가운데 40%인 50명 정도는 정신지체까지 앓고 있는 상태다.

"이런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들한테 스트레스 주면 안되죠. 내가 비록 눈이 보이지 않아도 믿고 맡겨요. 사실 특수학교 선생님들 참 착하거든요."

그는 일반 맹인들처럼 색깔 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맨 눈으로 선생님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눈을 좌우로 움직이며 농담을 섞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교실에 가서 선생님들 쫀 적 한번도 없어요. 나도 교사 해봤지만 선생님들한테 믿고 맡기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그는 교실 대신 운동장을 찾는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내 동생 같아요. 학교 후배들이기도 하지만 같은 맹인이다 보니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아요."

그는 틈나는 대로 운동장에 나가 학생들 손을 잡아주고 학교 동아리 가운데 하나인 밴드연습장을 찾아 박수를 쳐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교장으로서 어찌 아픔이 없었을까. 9월초 학교 큰 행사에 참석했던 내빈 가운데 몇 명이 던진 말은 김 교장의 머리에 또렷이 새겨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들은 김 교장한테 한 마디 던졌다.

"학교가 깨끗하지를 못하네. 자네 눈이 안보이니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청소 좀 해야겠어"
김 교장은 마음이 아팠다. 교사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돌려먹었다. 그리고 '다음처럼 다짐했다'고 밝혔다.

"나는 청지기 된 자일뿐이다. 청지기 된 자로서 심부름 하다가 잠깐 일하고 가는 것이다. 청지기 된 자로서 선생님들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면 된다."

"선생님들 쫀 적 한번도 없어요"

청지기란 '주인집에 얹혀 살면서 여러 잡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학교 관리자나 재단이 이런 청지기 정신만 갖는다면 '재단비리'니 '족벌재단'이니 '학교장의 전횡'이니 하는 말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사실 한빛맹학교도 족벌재단 퇴진운동을 98년부터 4년 동안이나 벌여왔다. 다음은 이를 다룬 국민일보 2000년 9월 23일치 기사.

▲한빛맹학교 부장회의.     ©윤근혁
"서울 수유1동 한빛맹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및 학부모 등 150여 명은 22일 재단 족벌체제 퇴장을 주장하며 학교에서 닷새째 밤샘농성을 계속했다.농성 도중 새벽 2시쯤 농성 중이던 졸업생 이모씨(38)가 왼손에 10cm 크기의 유리조각을 움켜쥐고 자해를 하는 바람에 119 구급대가 출동, 응급치료를 했으며 졸업생 김모씨(25)가 5층 창틀 안전봉 바깥쪽으로 5분간 매달려 구급대가 바닥에 매트리스를 설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농성자들은 재단 이사진이 시각장애인들을 배제한 채 대부분 K이사장(86·여)의 친·인척으로 구성돼 학교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족벌재단 퇴진운동의 한복판에 당시 이 학교 교사이던 김 교장이 있었다. 대학 시절 그의 별명은 '얌생이' 또는 '범생이'였다. 항상 도서관과 집만 오가던 이 순진한 학생이 억눌린 교사 생활 끝에 재단비리 척결을 위한 투쟁에 앞장선 것이다.

"정말 당차게 싸웠어요. 우리가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한 명도 없었어요. 하지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싸웠어요."

결국 이겼다. 지난해 11월 오랜 싸움 끝에 구 재단은 물러가고 민주 재단이 들어섰다. 새 재단은 싸움에 앞장섰던 김 교사를 새 교장으로 임명했다. 물론 만장일치였다. 싸움에 동참하지 않은 대부분의 교사들도 환영했다.

교장과 교무부장만 전교조 조합원

이 학교엔 전교조 소속 조합원이 두 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직함 앞에 '교'자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 명은 김 교장이고 또 다른 이는 이 학교 교무부장이다.

"사실 전교조 '전'자도 몰랐는데 재단비리를 보고 들고일어나긴 했지만 지치더라고요. 어떤 땐 심장이 꽉 막혀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평택 에바다 학교 권오일 선생님한테 도움을 청했지요. 그는 우선 전교조부터 가입하라고 해서 덜컥 가입했습니다."

그가 막상 교장이 되고 나니 과거 '그의 투쟁'은 현재의 교장 일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진담 반 농담 반이다.

"사실 많은 선생님들이 눈치를 살폈지요. 재단을 이긴 투쟁이 어디 있었나요. 더구나 싸움에 앞장 선 사람들이 몽땅 맹인들인데 이길 턱이 없는 싸움이라고 봤을 거예요. 하지만 이 싸움 후 내가 교장이 되니 교사들 통제가 아주 잘 돼요.(웃음)"

왜 통제가 잘 되는 것일까. 그의 웃는 얼굴은 우락부락한 '투사'라기보다는 철모르는 앳된 고등학생의 그것 같았다.

참여정부 들어 특수 교사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특수교육발전방안이란 청사진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내년도 특수교육 예산이 삭감되는 걸 본 이들은 고개를 떨궜다. 이에 대해 김 교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국가가 시장개념에 빠져 약자를 소홀히 한다면 그건 안됩니다. 인권차원에서 교육권을 찾아주어야 해요. 장애인들에게 교육은 재활과 관계가 있어요. 일반인은 더 잘 살기 위해 교육을 받지만 장애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교육을 받는 겁니다. 국가가 평생 부양하는 것보다는 재활교육을 잘 시키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왜 모를까요."

이런 그한테 '장애아가 있는 전국의 학급담임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요청했다. "음~"하고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의 입에서 말이 튀어 나왔다.

▲웃는 김양수 교장.     ©윤근혁
"사랑이죠. 뭐."

다시 물었다. "사랑이라니요. 그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요."

"장애인들은 콤플렉스가 있어요. 어찌 보면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싹수머리가 없어 보이기도 할겁니다. 보기에 따라선 단점 투성이로 보이지요. 하지만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콤플렉스가 있는 장애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면서 사랑을 베풀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교장

김 교장의 출근 시간은 7시 50분, 퇴근 시간은 저녁 8시나 9시다. 꼬박 12시간을 이 학교에서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학교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갈 때가 더 많다. 교육청과 서울시청, 언론사 문턱을 몇 번씩이나 넘고 넘었다. 후원금을 모아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다.

43년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지만 구 재단이 투자를 하지 않다 보니 시설은 정말 많이 낡은 상태다. 학교에 있는 4개 건물 가운데 점자도서관과 강당건물이 올 초 시설안전검사에서 D등급을 받을 정도였다. D등급이란 '안전사고 위험 때문에 학교를 빨리 철거할 정도'라는 판정인 것이다.

"지금 우린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아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지요. 족벌체제인 구 재단이 자기 잇속만 차렸지 학교에 투자를 하지 않았어요. 어서 새 건물을 세워야 해요."

그는 취재를 끝마치고 나서는 내 손목을 잡고 행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티켓을 50장만 갖고 가라"고 부탁했다.

"학교 건물이 철거할 정도로 낡았어요. 학교 건물을 증축해야 되는데 돈이 있어야지요. 모자라는 건축예산을 마련하려고 바자회를 열려고 해요."

이런 그의 행동과 말투 속에서 학교발전에 대한 집념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교장으로서 그의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박스 광고> 한빛맹학교 건물 신축을 위한 바자회

한빛맹학교 건물이 안전진단 결과 철거를 필요로 하는 D등급을 받았습니다. 교육청의 지원에도 모자라는 건축 예산을 모으기 위해 바자회 행사를 엽니다.
★때: 2003년 10월 17일·18일 오전 10시∼오후 5시
★곳: 서울 강북구 수유1동 한빛맹학교 운동장
★판매품목: 의류, 가전제품, 화장품, 농수산물 등
티켓 구입이나 방문을 원하시는 선생님은 전화 02-989-9135로 연락주세요

이 기사는 월간<우리아이들> 2003년 10월호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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