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에 걸맞는 교육부와 언론 권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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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들어 유행하는 말들이 몇 개 있다. ‘포퓰리즘’이란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에서 유래했다’는 이 말은 보통은 상대 권력을 겨냥할 때 주로 사용됐다. 일부에서는 ‘민중주의’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민중을 위한다기보다는 민중을 빙자하거나 사칭하는 엉터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잔치엔 서민들이 먹을 게 없다 "그들의 잔치엔 서민들이 먹을 게 없다." 우리 나라 일부 언론권력은 참여 정부의 정치 행태를 세차게 몰아세울 때마다 이 말을 즐겨 썼다. 어느 신문은 사설에서도 ‘평준화 또한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는 ‘막말’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평준화 폐기’를 주창하는 일부 언론권력한테서 포퓰리즘의 본 모습을 본다. 그래서 이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최근 ‘평준화가 학벌 세습의 원인’이란 논란을 부추긴 서울대 연구팀을 둘러싼 논란만 해도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일부 신문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낸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란 연구 결과를 두고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보도했다. “평준화 후 저소득층 더 불리”(조선) / “평준화가 학력 세습 불러”(중앙) / “평준화 정책-쉬운 출제경향이 부유층 자녀 서울대 진학 늘려”(동아) '부자가 서울대에 많이 들어오는 까닭’이 평준화 탓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보도 후 역풍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연구하지도 않은 평준화 문제를 언급한 것은 경솔했다’, ‘언론이 자기 입맛에 맞게 연구 내용을 확대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오죽했으면 사립학교 평준화 해체론자인 윤정일 교수(서울대 교육행정연수원장)까지 이 연구에 대해 화살을 겨눴을까. 윤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샘플링의 편협함’까지 문제삼았다. 교육부도 이례적으로 공개 비판문을 사이트에 올렸다. 며칠 전 인터뷰한 유인종 서울교육감은 ‘난센스’란 표현을 써가며 연구자들 뒤에 모 국가연구기관이 있다는 발언도 쏟아낸 바 있다. 이번 논란은 서민들을 놓고 벌인 일종의 잔치였다. ‘서민들이 서울대에 적게 가는 원인이 평준화 때문’이라는 검증되지도 않은 화려한 말잔치가 신문들을 도배했다. 이 속에서 일부 언론 권력은 부자가 아닌 서민을 위하는 척 하기도 했지만 ‘평준화 해체’에 있는 속셈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큰 잔치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서민의 처지에선 먹을 것이 없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 문제를 둘러싼 ‘포퓰리즘의 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 일부 언론 권력에게 각성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상심을 회복하길 바랄 뿐이다. 여론시장에 던져놓은 국가 정책 하기야 언론 권력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지난 해 말 교육부문에서도 ‘로드맵’이란 것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참여 과정을 거쳐 만든 것인지 교육 주체들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교육부총리가 바뀐 뒤 이 로드맵이 살아있는 것인지 사장된 것인지 알 도리도 없었다. 그들은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2일, 안병영 새 교육부총리가 강남 어느 학교 강당에서 벌인 ‘특강’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면서 깜짝 놀랐다. 로드맵의 내용 가운데 한두 개가 그의 입을 통해 너무도 쉽게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2008년 대입제도는 적어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학생을 뽑겠으며 내신성적이 중요하도록 만들어보는 등 큰 틀이 바뀔 수 있도록 하겠다.” “교사들도 질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현 교육체제에서 다양화, 경쟁체제가 어느 정도 들어가도록 하겠다” 여기서 이 말의 내용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다만 왜 이런 식으로 국가 주요 정책을 내놔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언론에 던져놓고 그 논란을 감상하려고 했던 것일까. 발표의 방식엔 문제가 컸다는 생각이다. 교육수장이라면 적어도 참여와 논의 속에서 대입제도 변경이라는 큰 틀을 마련하려고 노력함이 옳다. 교원 평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 특강에서 자신의 소신처럼 말하는 것은 정책의도를 축소시키는 것일뿐더러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론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면 포퓰리즘의 다른 형태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에 어울리는 교육정책을 학생, 학부모, 교사, 교육기관이라는 네 개의 ‘교육 주체’가 있다. 이 네 기둥이 힘을 합쳐 집을 지은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나아갈 방향을 밝히는 일은 ‘교육정책’의 몫이다. 기둥은 제 각기 서로를 믿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서 있어야 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개의 기둥 가운데 칼자루를 쥔 쪽은 아무래도 교육행정기관이다. 그래서 교육부와 교육청 등이 교육정책을 주도하는 일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적어도 참여정부에 속한 이들이라면 여론시장에 ‘던져놓기식’ 정책 추진은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 포퓰리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한국교육개발원 <주간 교육정책포럼> 2004년 2월 12일치에 쓴 것입니다. |
2009년 8월 26일 수요일
교육 ‘포퓰리즘’의 색다른 형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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