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8일 금요일

비평준화 14년, ‘쪽팔린 교복’만 남았다

강원교육은 ‘60년대식 학벌병’에 누워 있었네
 
윤근혁
 
평준화운동 현장- 강원도에 가다

춘천에서 가장 큰 번화가인 명동거리엔 이른바 이 지역 명문고인 춘천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만 보인다. 비평준화 지역인 강원도에서는 교복과 교표만 봐도 학생의 성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옥수 기자

교사와 학부모들이 깃발을 들었다. 강원도에서 생긴 일이다.

전교조 강원지부, 민주노총, 참교육학부모회 등 14개 교육노동단체들이 모인 고교평준화실현강원교육연대(상임공동대표 김효문 전교조 강원지부장)가 올해 5월부터 5개월째 장기간 집회에 이어 단식농성까지 벌이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바람은 뜻밖에도 소박하다. 김효문 대표는 “내가 이렇게 단식농성하는 까닭은 고등학생들이 자기 학교 교복 입고 춘천 명동거리를 어깨 펴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라고 지난 9월 27일 말했다. “어린 청춘들이 ‘고교학벌’이란 족쇄에 묶여 병적인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게 되는 잘못된 제도를 바꿔보겠다”는 얘기다.


14년 전에 생긴 불행의 씨앗

이 지역 고교생들이 자기 학교 교복을 창피하게 생각하게 된 때는 지금부터 14년 전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년간 유지되던 고교평준화가 해제된 것이 바로 이 때다.

고교비평준화 14년만에 아이들이 자기 학교 교복과 교표를 부끄럽게 여기는 해괴한 형편이 되었다는 게 강원교육연대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다음은 김진규 전교조 강원지부 정책실장의 전언이다.

“교복 색깔로 어릴 때부터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돼요. 만 12살 중2만 돼도 명문고 행 차표를 끊은 선택된 소수와 열패감에 빠진 다수의 아이들로 확 나뉩니다.”

춘(천)고, 강(릉)고, 원(주)고 등 이른바 ‘삼총사’가 선택된 명문고에 속한다. 춘천여고, 강릉여고, 원주여고도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명문고로 통한다. 이 지역 17개 시군에 모두 62개 고교가 있으니 선택된 아이들은 10%가 좀 못되는 셈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명문고는 대학입시라는 특수목적을 띤 유사 특목고일 뿐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웃지 못할 일들도 생긴다.

평일 낮 2시에 춘고 교복을 입은 학생과 일반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앞뒤로 걸어간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뒤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춘고 학생은 아파서 병원을 가는데, 그 뒤에 가는 녀석은 땡땡이를 치고 다니는구나.”

토요일 저녁시간, 춘천에서 가장 큰 번화가인 명동거리엔 춘고와 춘천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만 들끓고 있다고 한다. 다른 고교 학생들은 집에서 놀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더 많은 일반고 학생들은 누가 교복을 볼세라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쪽팔려서 교복입고 거리 못 나가요.” 이런 말을 일주일이면 몇 번씩 듣는다고 정 아무개 교사(ㅂ고)는 귀띔했다. 정 교사는 “이런 상황이니까 일반고는 완전히 ‘봉숭아학당’이 되어 버린다”고 한탄한다. “꿈을 갖고 학교에 다녀야 할 아이들이 패배감과 가슴속 한을 품고 다닌다”고 한다.

얼마 전 최 아무개 교사(강릉 ㄱ고)는 강릉에 있는 어느 약국에서 이상한 모습을 봤다.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대뜸, “우리 아들이 강고 2학년인데, 감기 약 좀 지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교복을 입은 춘천여고 학생들. 안옥수 기자


학생들 다수 “고교 서열화 해소 위해 평준화 필요”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중고생들은 평준화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최근 한길리서치 조사결과를 보면 이 지역 중고생의 85%가 이런 의견을 나타냈다. 평준화 도입에 찬성하는 이유 또한 이들의 속마음을 잘 알 수 있다. “고등학교 서열화가 해소되어서”(29.0%)를 가장 많이 꼽은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학생들이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고교학벌에 대해서는 강원교육청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강원교육청 중견간부는 “강원도에 고등학교 학벌주의가 뿌리 깊은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면서도 “그렇다고 교육체제를 뒤바꿀 비평준화를 평준화로 돌이킬 만큼 중대한 문제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란 명문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고, 이 아이들은 지역으로 돌아와 교육계와 정치계, 경제계 실권을 잡는다고 한다. 이른바 ‘강원도식 학벌 패밀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장수 교육감도 이 학벌패밀리 소속이라는 게 강원교육연대의 주장이다.

다른 대부분의 지역이 대학 학벌로 몸살을 앓을 때, 2005년 강원도 교육은 60년대식 ‘고교학벌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 기사는 <교육희망> 2005월 10월 2일치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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