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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일 이수호 전 전교조위원장이 13년만에 '평교사'로 학교에 첫 출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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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윤근혁 | 그가 돌아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교사' 이수호(전 전교조위원장·54)로.
2월 11일 아침 7시 30분. 지난해까지 전교조 위원장을 맡았던 이 교사는 서울 1호선 석계 전철역 근처 집을 나섰다. 평소 매지 않던 빨간 줄무늬 넥타이를 목에 두른 그는 서울 용산에 있는 선린인터넷고(구 선린정보산업고) 정문을 8시 10분께 들어섰다.
"벌써 오십 줄을 넘겼는데도 어젯밤엔 잠을 설쳤어요." 전교조 관련 해직생활 9년, 전교조 전임 근무 4년만에 다시 고등학교 국어를 가르치는 '평교사'로 돌아온 것이다. 전교조 결성대회 하루 전인 89년 5월 27일, 경찰의 눈을 피해 동료 교사의 차 트렁크에 몸을 숨긴 채 서울 신일고 정문을 빠져 나온 지 13년만의 일이다.
'트렁크'에 숨어 나간 89년, 걸어 들어온 2003년
이날 정오께 이수호 교사는 학교 본관 2층에 있는 제 3교무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개학 첫날 첫 출근이라 학교에서 아직 '책걸상'을 마련해 놓지 않은 것이다. 소파 앞 책상엔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최홍이 서울시교육위원의 '평교사는 아름답다'와 박노해씨의 '참된 시작'이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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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1년 국회앞에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외치며 삭발하는 이수호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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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교육희망 안옥수 | 그는 아침 교무회의에서 다음처럼 짧고 평범한 인사말을 했다고 밝혔다. "다시 학교에 돌아오게 되어 반갑다. 뭐니뭐니해도 교사는 학교에 오는 것이 좋더라. 올해 아이들 잘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
그가 교직에 첫발을 뗀 것은 74년. 경북 울진에 있는 제동중학교였다. 그는 뜻밖에도 고3 재학 시절까지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고3 때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공고 야간에 설치된 국립기술원양성소에 기술을 배우러 다녔어요. 그런데 저를 아껴주시던 담임 선생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야간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국문과를 선택하게 된 것이지요."(이수호, '예수, 학교에 가다', 두리미디어)
지방의 야간 대학 교직과정 출신 국어교사. 학벌을 따지는 사회에서 결코 내세우기 어려운 학력이지만 그는 "교사가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렇게 80년 초까지 그는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노력하는 교사였다.
지방 야간 대학 출신 '문제 교사'
77년 서울 신일고로 학교를 옮긴 그는 '학급 전원 개근, 서울대 최고 진학률'을 자랑하는 능력있는(?) 교사였다. 그러던 그가 80년대 중반부터 YMCA 교사회에 참여하는가 하면, 전두환 정권 시절 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고, 심지어 89년엔 해직을 각오하고 전교조 창립 활동에 뛰어 든다. 노무현 정부의 교육 기조가 된 '학벌주의 타파'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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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쟁복 입은 이수호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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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오마이뉴스 | "아이들이 시험에 질려 자살하고 보충수업으로 누렇게 떠가는 상황에서 제가 열심히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실무처장으로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그는 결국 90년엔 6개월간 투옥되기에 이른다. 문제 있는 '의식화교사'란 딱지가 조선·동아 등 보수언론에 의해 붙여진다. 이 참교육과 교육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단식투쟁'과 '투옥생활'로 몸은 뼈만 남게 되어 비로소 그의 별명인 '마른 막대기'란 말이 붙여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교사는 스무 평 교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정치의 개혁과 민주화 없이는 사회의 민주화도 어렵고 교육의 개혁을 통한 발전도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오히려 이 시대의 교사로서 이 나라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 행동들을 했습니다."(이수호, 항소이유서, 1992)
이제 노무현 정부 출범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오늘, 그는 2년 동안의 전교조위원장 활동을 접고 다시 아이들 앞에 섰다. 대신 아이러니컬하게도 직전 전교조위원장을 역임한 이부영 교사는 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교 뒷동산 텃밭을 가꾸다가 올 1월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재임 시절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교육부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인 것이 이제 와서 실형을 선고받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마치 '배턴'을 서로 주고받듯이 전직 위원장이 자리를 바꾼 셈이 됐다. 둘 다 관리직 교장·교감이 아니라 '평교사' 노릇을 바랐지만 우리 현실은 이런 희망사항도 녹록하게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 당선자와 손잡은 89년 연세대
'마른 막대기' 이수호 교사와 노 당선자의 만남은 89년 5월 1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교원노조 설립을 위한 수도권발기인대회장에서 전교조 사무처장 내정자인 그가 노 당시 국회의원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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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년 사립학교법 개정을 위한 농성에 참석한 이수호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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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윤근혁 | "10년 후 여기 모인 선생님의 제자들이 그 때 '선생님은 어디에 있었냐' 고 묻거든 당당하게 말하자. 우리는 민족·민주·인간화 참교육을 위해 구속과 해직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 모였다고…."
이어 노 당선자도 격려사를 시작했다. 노 당선자는 "선생님들의 참교육을 위한 활동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며 정당한 활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당시 참석 교사들은 "이 때 국회의원 신분인 노무현 당선자가 직접 나와 격려사를 한 것은 전교조 교사들로선 굉장한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전교조 위원장 재임시절 '몸 부조'와 '예술적 회의(?)주의자'라는 별칭을 심심찮게 들었다. 잠시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빈민과 농민들의 활동이 있을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들의 기자회견 사진을 보면 한 쪽에서 고개 숙이고 있는 이 교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우리가 우리보다 어려운 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몸이며, 이 분들은 '선생님' 출신 전교조 대표가 왔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얻는 것을 봤다"고 말한 바 있다. '몸 부조' 얘기인 것이다.
그는 또 조직 대표로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사회를 보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교조 위원장 재직시절은 물론 95년 서울시교육위원, 정부의 최저임금심의위원, 국민연금 기금관리위원 등을 할 때 '설득과 대화를 강조하는 그의 합리적인 태도는 본을 살만 했다'고 교육관료들까지 말할 정도였다. 물론 이런 그의 태도를 안 좋게 본 일부 교사들은 '회색적인 타협주의자'란 비판을 하기도 했다.
"놀랄 일은 교육관료가 변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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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호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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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교육희망 안옥수 | 그는 교사 가운데 가장 많이 교육부관료를 상대했다. 수없이 진행된 전교조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단체협상과 정책협의회에 대표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기에 교육관료를 보는 그의 시각은 남다르다.
"10여 년 넘게 교육관료를 상대했는데 놀라운 일은 이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기능적이고 세밀한 점은 배울만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을 잘 모르는 비전문가이다 보니 대증 요법이나 임시처방에 능할 뿐이었다. 교육에 대한 신념과 철학에 바탕한 관료개혁이 필요한 때다."
이제 학교로 돌아온 이 교사의 목소리는 전체 교사보다는 학급 아이들한테 울려 퍼질 것이다. 전교조에서 1월 초에 연 '참교육실천보고대회'의 추진본부에서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2박3일 동안 '국어분과' 강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연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교사는 무엇보다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게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과전문성도 소중하지요. 그 동안 학교 밖에서 겪은 일들이 교사생활에 녹아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근무할 선린인터넷고 정문을 들어서면 5m크기의 바윗돌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엔 '백년을 딛고 천년을 날자'는 글귀가 적혀 있다. 1백년 근대 교육을 딛고 새 천년을 맞는 교육을 생각하며 '마른 막대기' 이수호 교사가 맨몸으로 아이들한테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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