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6일 수요일

종이잡지가 컴퓨터를 이길 수 있을까

세상에 처음 나온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윤근혁
 

▲<고래가 그랬어> 표지     ©윤근혁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을 기억하시는가. 대개의 초등교사들은 비록 몇 달 지난 헌책이었지만 이런 책을 품안에 품고 히히덕거리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어린이 교양지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전성기를 누리면서 큰 인기를 모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들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이런 책 대신 만화영화와 게임이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놓고 있다. 어린이 교양지는 최소한 <고래가 그랬어>((주)야간비행)가 나오기 전까지는 박물관 신세인 줄 알았다. <고래가 그랬어>가 처음 얼굴을 드러낸 때는 올 10월 1일. '종이잡지'는 한물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시대에 '종이잡지의 정체성'을 내걸었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다.

한물간 종이잡지를 새로 만들다

"다른 미디어들에 견줄 때 종이잡지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교양"이라고 이 잡지의 편집 진은 보고 있다. "<고래가 그랬어>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어린이 교양 월간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고래가 그랬어>는 창간과 함께 다음처럼 외쳤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몹쓸 상업주의 문화가 하루가 다르게 우리 삶과 정신 속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을 배우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찌감치 무한경쟁의 바다에 내던져집니다. 이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고래가 그랬어>는 그런 고민을 담아 만듭니다.”(창간 안내글)

이른바 상업주의 문화와 무한경쟁에 대한 반대깃발을 분명하게 올린 것이다. 그럼 이 잡지는 이를 위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고래가 그랬어>는 어설프게 시류에 편승하는 것 대신 '정통 교양’을 내세운다. 기존 어린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미디어비평과 인권 문제, 양성평등 그리고 심지어 노동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물론 수학과 철학, 만들기 등 아이들한테 꼭 필요한 필수 영양소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았더라도 졸음을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 봐야 하는 잡지라면 이미 잡지가 잡지이기를 포기한 것일 터.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래가 그랬어>가 사용한 그릇은 '만화'다. 이 잡지 분량의 2/3 정도는 만화로 채워 있다. 30개 이상의 기사 꼭지를 살펴보면서 드는 생각은 언뜻 만화잡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래가 그랬어>는 만화잡지가 아니라 ‘만화라는 그릇’을 쓴 교양잡지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하 꼭지소개 글은 이선이 씨의 글 참조)

만화라는 그릇으로 교양을 담는다

<뚝딱뚝딱 인권 짓기>(글 인권운동사랑방, 그림 윤정주)는 어린이가 어른의 부속품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쉬운 글과 만화로 나타냈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당당히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권장한다.

▲<고래가 그랬어> 사무실.     ©윤근혁
전태일의 일생을 그린 <태일이>(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최호철의 그림은 한 컷, 한 컷 그 자체로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한겨레신문의 '비빔툰'으로 유명한 홍승우씨는 <신세기 소년 파브르>를 그린다. 욕심꾸러기 인간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곤충들을 살리기 위해 버그 은하계 ‘곤충성’에서 급파한 복제소년 파브르의 모험을 담은 이 작품은 도시 아이들에게 곤충에 대한 정보는 물론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도 가르친다.

<열무낭자>(글 그림 유승하)는 여성을 상품이나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폭력을 조금씩 깨뜨려나가는 모험담이다. 겉모습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만화들 사이에는 재활용 쓰레기로 장난감을 만드는 <퉁퉁이 아저씨의 얼렁뚱땅 공작교실>(구성 현태준), 직접 요리에 도전하면서 화학 조미료와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하는 식습관을 기르기 위한 <알콩이와 달콩이의 보글보글 부엌>(글 편집부, 그림 홍시야),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주인공과 수학을 못해서 자살한 귀신의 만남을 그린 <수학의 가치와 그 효용성>(글·그림 강무선) 등 깊이 있는 고민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거대 자본의 횡포(<나쁜 장사꾼들>-“햄버거 속엔 뭐가 들었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고정관념을 깨면 아플까?>-“부자 나라의 국민은 행복할까?”)처럼 ‘심오한’ 주제는 오히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당찬 '고래'가 되길

<고래가 그랬어>란 제호 앞에는 '떳떳하게 그리고 함께'란 기치가 적혀 있다. 소년신문과 같은 상업 학습지 신문이 판치는 세상에서 떳떳한 잡지가 되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을 터다. <고래가 그랬어>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창간과 함께 몇 가지 약속을 하기도 했다.

"<고래가 그랬어>는 단지 돈이 없어 잡지를 볼 수 없는 어린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는 상품광고는 억만금을 주어도 싣지 않겠습니다. 언론을 가장해 진실을 감추고 우리 사회의 진보를 훼방하는 신문엔 홍보를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이 같은 약속에 대한 첫 작업으로 초등교사와 전교조 조합원한테는 잡지 가격(9000원)의 40%를 할인한다. 진보노동운동 단체 상근활동가에겐 30%를 깎아준다. 돈이 없어 잡지를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도록 무료구독 후원행사도 벌일 예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떳떳하게 그리고 함께'라는 신심을 버리지 않는 것. 많은 이들은 '당찬 고래'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구독문의: 080-454-7942

이 기사는 <우리아이들> 11월호에 쓴 것입니다.

 
2003/10/22 [23:53] ⓒ 윤근혁의 교육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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